Desultory remark

[뮤지컬_베르테르] 젊지 않은 베르테르의 슬픔

worldly 2013. 12. 21. 11:25

Werther

 

2013. 12.20. Fri. 오후 8시

예술의 전당 CJ 토월극장

캐스팅: 엄기준(베르테르), 이지혜 (롯데), 이상현 (알베르트), 최나래 (오르카), 이승재 (카인즈),...

BC스페셜데이 였던, 12월 20일.

11년 이상 계속 연출되는 창작 뮤지컬. 그 속에는 무슨 힘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 택하게 된 뮤지컬.

원작이 너무나 유명하고 많이 읽혔기 때문에 더 주목하게 된 뮤지컬.

 

 

또한 정승호 무대감독의 또 하나의 작품. 지난번 햄릿에서 그 작은(?) 무대를 살뜰히 구조 변형하여 개조한 모습이 인상 깊었는데, 그 예술은 베르테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장치의 이동이 많은 것은 자칫 관객의 집중도를 떨어뜨리고 극의 흐름을 매끄럽지않게 하는 위험이 높은데, 그 것을 잘 조절하는게 가장 문제 일것 같다.

약간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와 비슷하게 무대의 정중앙의 단을 세워 공간을 나누고 막의 닫힘을 적절히 이용하여 시간의 흐름을 끝는 기법은 매우 좋았다. 또한 이 정중앙의 단이 움직인다는 것이 신선하게 보였다.

베르테르 극 자체의 인물들은 현대의 21세기 인물형과 많이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공감을 얻어내기는 쉽지 않은 극이라, 이러한 감정선을 따라가는데 음악과 무대장치, 특히 조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극의 이러한 전반적 내용을 보기 위해서는 앞줄보다 2층에서 보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을 보는데 매우 유용하다. 그런점에서 토월의 2층 선택은 할 때마다 선택한 나를 칭찬하고 싶다. 어제도 조명에 의해 무대에 비춘 그림자들을 보며, 인물들이 가지는 선 하나하나를 따라가는 감상을 했다.

무대에서 처음 접한 배우들이 많을 경우, 대비없이 그냥 관람해서, 많은 아쉬움도 있었고, 생각지도 못한 감동에 배우에 대한 애정도가 높아지기도 한다. 베르테르의 경우에는 전자가 좀더 높아 극을 관람하고 나서는 그 점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하지만, 극 전반의 흐름을 좌우하는 연출, 공간 사용, 그리고 너무나 아름다운 실내악. 오히려 많은 공연에서 배우의 연기를 지지해주더 외부적인 조건들이 더 잘 표현된 극이란 생각을 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사람들은 리사이트에 갈 때는 주로 건반과 연주자의 손이 보이는 위치가 가장 명당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2층 우불 1열은 음감님의 건반과 그 선율에 집중할 수 있는 위치였다. 하나 눌러져 나오는 소리는 베르테르의 아픔이 하나 하나 집고 누르는 힘이 었고, 돌뿌리가 무릎에서 가슴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 크기와 비례했다.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여린 감성의 남자. 그리고 그 것을 깨달은 착한 소위 어장 관리를 해 버린 여자. 그런 여자를 믿고 사랑하기에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조차 묵인하는 남자. 보통 현대의 사람들은 불륜이라 생각하고 정신이상자라도 치부할 수 있는 스토리지만,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는 고전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강한 끌림이 있는 것이다.

이런 베르테르의 사랑을 하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로 표헌한 것은 아마도 관객에게 직접 보여주려는 의도 같다.

베르테르의 잘못된 선택 그러나, 그는 그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가 그의 세상에서 택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그의 첫단추가 잘못 채워져서 풀을 수 없었기에... 그의 여린 감성이 그를 폭력으로 이끌지라도 그의 감성은 여전히 깨끗하게 보이는게 아닐까.

 

 

 

 

결론은 젊지 않아서 조금 더 인생의 슬픔을 알아버린 베르테르였다.

젊은 베르테르였다면 젊은 혈기에 더 어려운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두도시 이야기의 시드니와 베르테는 모두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사랑했지만 그들의 선택은 극명하게 나뉜다. 모두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했지만, 시드니는 그의 죽음으로 한가족을 지켰고, 그 가족을 지킴으로써 무참히 살해 당했을지도 모른 혁명에서 희망을 낳았다. 그러나, 베르테르는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그의 사랑을 꺠달은 여자에게 슬픔을 주었고, 아마 그의 가족에게는 죄책감을 더 짐지우지 않았을까, 그리고 많은 젊은 로맨티스트라 일컫는 자들에게 자살이란 허무한 해답의 허명을 남겨주었을 뿐이다.